리뷰 및 공략/영화

'파인애플, 좋아해요?' 세기말 홍콩 로맨스 중경삼림.

상연 2021. 3. 20. 23:17

목차

    파인애플, 좋아해요?

    솔직히 메세지는 세기말이라 구리게 느껴지는데, 메신저가 사기다.

    금성무 얼굴이면 파인애플 대신 뭘 집어넣든 홀린 듯이 네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휘에서는 세월이 느껴지는 영화지만, 얼굴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최신인 영화였던 중경삼림.

    전에 '나의 소녀시대'를 보면서도 느꼈지만 중국~홍콩 영화를 볼 때는 유독 남배우들 얼굴에 감탄하게 되는 것 같다.

     

    코로나로 점차 가세가 기울어가는 영화관 산업의 소년소녀 가장이 되어버린 우리 재개봉 명작들.

    과연 중경삼림은 영화관 전기세라도 보탤만한 명작이었는가?

    전기세를 못 내면 촛불을...


    당신에게도 지금, 당신만의 통조림이 있나요?

    우리가 헤어진 날은 하필 만우절이어서
    난 그녀가 농담하는 걸로 알았다.

    농담이 한 달만 가길 바라며
    헤어진 그 날부터 매일
    5월 1일이 유통 기한인 파인애플 통조림을 샀다.

    메이는 파인애플 통조림을 좋아했다.

    5월 1일은 내 생일, 30개의 통조림을 다 샀을 때에도 그녀가 돌아오지 않는다면
    사랑의 유통기한도 끝이다.

    -중경삼림 첫 번째 이야기 중-

    '통조림의 유통기한'은 첫 번째 이야기를 관통한다.

    경찰 223에게는 헤어진 연인을 비워내기까지의 기한을 나타내고

    여인에게는 꼬여버린 조직 일을 해결하기까지의 기한을 나타낸다.

    의미는 조금 다르지만 각자의 유통기한의 끝에 다다른 두 사람은 술집에서 만나 각자의 입장에서 끝을 정리한다.

    하지만 통조림도 유통기한이 하루 이틀 지났다고 해서 바로 부패하지는 않듯이

    사람일도 유통기한에 맞춰 딱딱 끊어지지는 않는다. 

    경찰 223은 자신의 생일에 맞춰 들어온 삐삐 알림이 행여 헤어진 전 연인이 아닐까 하며 부리나케 달려가는 모습에서 아직은 완연히 정리되지 않은 모습을 보였으며 여인의 경우에는 조직 보스를 죽이고 가발을 벗어던지며 본연의 자신을 찾아가는 듯한 모습을 보였지만 글쎄, 그것은 연결고리의 일단락일 뿐 여인의 마음은 혼재하지 않을까 생각된다.

    유통기한은 어디까지나 유통할 수 있는 기간인 것이다.

    그것을 소비할 수 있는 기간은 유통기한보다 더 길다.

    소비기한까지 완전히 지나고 나서야 통조림에게는 부패가, 사람일에는 새로운 시작이 들어서는 것이다.

    자칫 촌스러울 수 있었던 '정리에 필요한 시간'을 통조림을 통해 나타냄으로써 중경삼림 첫 번째 이야기는 멋들어지게 남녀 간의 이별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내었다.


    나의 통조림

    나에게도 통조림들이 있다. 그 통조림은 중경삼림처럼 지난 인연에 대한 것일 수도, 다른 무언가에 대한 후회일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내 마음속에는 그 모든 통조림을 정리할 만한 선반은 없다는 것이다.

    어떠한 통조림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직 힘겹지만, 어떠한 통조림은 어딘가 마음 한구석에서 천천히 썩어가고 있다.

     

    그리고, 어떠한 통조림에는 원래 새겨진 유통기한 위로 몇 번이고 새로 늘린 유통기한이 덧칠해져 있다.

    그 안에 내용물이 이미 썩은 줄도 모르고.

     

    지금에서야 덤덤히 그것을 버려낼 수 있지만, 이전에는 한없이 유통기한이 끝나지 않았기를 바랐었다.

     

    이제는 그것이 얼마나 미련한 짓인지 너무나도 잘 알게 되었다.

    억지로 새로운 유통기한 라벨을 덧붙이며 새로운 통조림이 들어서는 것도 모르고 썩혀버렸다.

     

    모든 것은 순간의 판단이 좌지우지하고, 유통기한이 있다.

     

    경찰 223은 "사랑에 유통기한이 있다면 나는 만년으로 하고 싶다."라고 했다.

    나도 공감한다. 사랑이라는 상표의 통조림의 유통기한이 길었으면 좋겠다. 

    이제는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것을 붙잡는 것이 얼마나 무의미한지 알기 때문에 더더욱.

     


    사람이 울면 휴지로 눈물을 닦으면 되지만, 방이 울면 일이 많아진다.

    두 번째 이야기의 명대사다.

    그리고 나는 이 대사가 이야기의 주제라고 생각했다.

    경찰 633은 승무원과 열애 중 헤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제는 그녀가 없어진 쓸쓸한 방에서 물건들에게 말을 건넨다.

    그만 울어 계속 울기만 할 거야?
    강해져야지. 왜 축 쳐져만 있는 거야? 내가 도와줄게.

    그리고, 이런 그를 좋아하게 된 사람 '페이'가 있다.

    그녀는 경찰 633의 전 애인이 남기고 간 편지에서 그의 집 열쇠를 발견하게 되고 이로 인해 그의 집에 들어가고 싶다는 백일몽을 꾸게 된다. 

    보통이라면 백일몽에서 그치고 말 것을 그녀는 이를 실제로 행하게 된다.

    그리고 그날, 경찰 633은 전 연인이 예전처럼 집에 숨어있기를 바라며 허상을 좇아 찾아보지만

    실상 숨어있던 것은 백일몽에 허우적대고 있었던 페이였다.

    그리고 아마, 내 생각에는 떠나간 연인을 좇는 그의 그러한 모습에서 페이는 그에게서 전 연인의 흔적을 다 지우고 싶다는 생각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페이는 가게일을 소홀히 해가며 그의 집을 바꿔나가기 시작하고

    경찰 633 또한 변해가는 집 안에서 조금 더 밝아져만 간다.

    넌 많이 변했어. 알아? 그녀와 상관없이 넌 변치 말아야지! 스스로 반성해봐!
    수건이 울 때는 기분이 좋다.
    본질은 변치 않아 여전히 감성 풍부한 수건이다.

    그렇게 얼마나 흔적을 지워내고 페이 자신을 각인시켰을까.

    영원한 비밀은 없기에 들켜버리고 만다.

    남몰래 집에 들어온 그녀에게 충분히 불쾌함을 느낄 수도 있는 상황이었음에도 되려 경찰 633은 페이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게 된다. 아마 고민을 하며 그녀 덕에 긍정적인 변화에 큰 도움이 되었다고 생각한 듯한다.

    그렇게 열심히 경찰 633을 위해 노력했던 그녀라면 응당 데이트에 나와 좋은 결과가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웬걸, 그녀는 나오지 않고 경찰 633에게 편지를 남기고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1년 뒤, 둘은 서로의 첫 만남 장소였던 가게에서 만나게 된다.

    경찰 633은 가게 주인이 되어서, 페이는 승무원이 되어서.

    사실, 아직도 왜 굳이 페이가 승무원이 되어서 돌아왔는지는 모르겠다.

    단순히 그의 전 애인의 흔적을 정리하면서 승무원이 하고 싶어 져서?

    이전의 애인과 같은 승무원 애인이 되고 싶어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아직 조금 더 생각이 필요할 것 같다.

     

    어찌 됐든 내가 생각하는 두 번째 이야기의 핵심은 이것이다.

    사람을 정리할 때 단순히 마음만 슬프면 울면 되지만, 그 사람의 흔적이 눈에 차이면 그것 또한 정리해야 한다는 것.

    흔히 헤어진 커플들의 SNS가 공허해지는 것을 생각해보면 되겠다.

     

    하지만, 단순 연인 사이보다 더 나아가서 무언가 정리를 한다는 게 굉장히 괴롭고 힘든 일이 될 수 있다.

    어쩌면, 자신이 정리할 수 없는 무언가로 흔적이 남겨져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누군가가 대신 흔적을 정리해주고, 일상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어준다면 참으로 고마운 사람이다.

     

    당장 영화를 보는 도중에는 페이가 참 집착이 심하고, 백일몽에 미쳐 허우적대는 거라 치부했지만

    왜 경찰 633이 그럼에도 그녀에게 데이트 신청을 하고 홀연히 떠난 그녀를 기다렸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니 이해됐다.

     

    지금의 나에게도, 새로운 활기가 필요하다고 점차 느끼는 요즘이다.

    이럴 때일수록 흔적 투성이인 집 안에 박혀있으면 더욱더 깊은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흔적보다 새로운 것들이 산재하는 집 밖을 돌아다니며 활기를 찾아야 한다.

     

    나에게도 페이 같은 존재가 있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집 안에만 있는다고 해서 덜컥 하늘에서 떨어져 내려오진 않는다.

    결국 찾아내는 것은 본인의 몫이다.

     

    이별 후의 극복을 페이라는 독특한 캐릭터로 소화해냈다는 부분에서 두 번째 이야기는 굉장히 재미있었다.


     

    첫 번째, 두 번째 이야기 모두 몹시 재미있었고, 곰곰이 생각해 볼거리가 많은 영화였다.

    이별 후의 슬픔, 극복 뭐 이런 쪽으로 생각해보다 보니 이터널 선샤인도 종종 생각이 났다.

    굳이 더 좋았던 이야기를 특정해보라고 한다면, 나는 아마 첫 번째를 고르지 않을까 싶다.

    조금 더 무거운 분위기와 이야기에서 느껴지는 공감대적인 부분이 첫 번째 이야기가 더 와 닿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일까, 감상평의 질적인 부분도 개인적으로는 첫 번째에서 좀 더 힘이 들어갔다.

     

    요즘 로맨스 영화에서는 느낄 수 없는 세기말 로맨스 감성.

     

    뭐랄까... 매일 츄파츕스만 먹다가 누룽지 사탕을 먹은 기분이다.

    구도, 필름 카메라 감성, 그 시대 분위기까지. 지금은 스크린으로밖에 느낄 수 없기에 더 흥미로웠던 중경삼림.

     

    조만간 스크린에서 내려가기 전에 꼭 한 번쯤은 봐 볼 만한 영화라고 생각된다.

     

    그리고, 언젠가 코로나가 풀리면 홍콩 미드레벨 에스컬레이터에도 가 보고 말이다.